‘소리없이 강했던’ 레간자. 대우자판 투쟁기.

현재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와 홈플러스 비정규직 투쟁장과 달리 대우자동차판매주식회사(이하 대우자판)의 경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업장은 아니다. 노조원 대다수가 남성 판매직이자 고학력자로 이루어진 대우자판 투쟁은 세상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며, 2011년 ‘인천지역 최대 규모의 정리해고’라는 이름으로 되돌아왔다. 현재 장기 점거농성중인 대우자판 본사건물은 지난 날 삶의 터전에서 투쟁의 장소로 변모되었고, 노조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공간의 변화와 함께 삭제된 개인의 목소리에 주목한다.

[photo : 대우자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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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 많은 영업직 중에 왜 자동차 판매를 선택하셨어요

자동차가 매력이 있었어요. 나한테 맞을 거 같더라고. 실제 자동차는 꼭 필요한 사람만 사는 거니까. 이건 수요가 고정적이다. 그래서 끌렸죠.

Q: 현대랑 기아도 있는데 굳이 대우자판을 선택하셨어요

당시 르망이 제일 예쁘더라고. 엑셀은 안 예뻤어요.(웃음).

Q: 우리나라가 마이카 시대에 돌입한 것이 80년대부터인데요. 90년대 초반에 입사하실 때 자동차 열풍은 어느 정도였나요

80년대 중후반에 마이카시대 붐이 일어나고 이미 형편이 되는 사람들은 이미 다 사버렸더라고. 제가 입사할 때 르망 열풍도 끝나는 시점이었고, 94년도부터 대우자동차판매가 전문회사로 바뀌고 김우중 회장이 자동차에 전념하면서 출시한게 레간자, 라노스, 누비라. 이 세가지 차가 나오면서 대우차 판매가 많이 늘어났어요.

Q: ‘레간자’의 경우 “소리 없이 강하다”라는 광고카피가 기억에 남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차라는 건 일반적으로 자기 과시욕 이게 상당히 크죠. 그리고 자기 목숨이 달린 거니까. ‘차는 튼튼해야 한다.’ 그런 것도 많이 작용을 했고. 그 전까지 대우차는 ‘튼튼하지만 시끄럽다’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레간자 출시부터 이미지가 많이 좋아졌어요

Q: 어떻게 노조 활동을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자동차 영업의 특징이 직장생활인데도 불구하고 군대 같은 게 있어요. 심지어는 지점장이 조회 때 차 못 판다고 책상에 무릎 꿇어앉게 하고. 다행히 우리 영업소는 노동조합의 성향이 강한 곳이라서 차 못 판다고 지점장이 재떨이 던지고 하지는 않았지. 대의원 총무와 같이 조직도 잘 되어있고. 자연스럽게 노동조합이 있으니까 이런 게 좀 덜하구나 그랬죠.

Q: 다른 대기업보다 대우는 노사관계가 좀 달랐나봅니다.

기본적으로 대우는 다른 대기업들과 성장과정이 틀려요. 박통시절 수위계약으로 부도기업들을 인수를 해서 단기간에 확 큰 회사니까. 하나로 통일될 수가 없는 구조랄까. 김우중 회장 시절에는 측근에 서울대 운동권 출신들을 많이 썼죠. 오히려 운동권 핵심을 데리고 다니면서 노조를 많이 회유했어요. 그런 개념으로 대우그룹이 출발하다 보니까 노사관계자체가 겉으로는 아주 극단적이지는 않았어요. 노사는 상생해야된다 서로 인정해야된다 뭐 그렇게.

Q: 미국같은경우 레이건 시절 신자유주의 정책아래 GM모터스와 같은 금속노조부터 짓밟기 시작했잖아요. 우리나라의 경우 IMF시절 김대중 정권 때 부평 대우자동차 진압사태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그렇죠. 그런데 대우자동차와 대우자판은 같은 금속노조 산하이긴 하지만 우리는 강성이라기보다 자기권리를 찾는 편이었어요. 대리점정책도 가장 먼저 시작한 게 대우자판이라 우리 판매직 노동조합이 먼저 자기권리를 위해 싸울 수 밖에 없었어요. 현대 기아는 생산노동자들이 노조지부장하고 그랬으니까 판매직들에 대한 본질적인 한계는 있죠. 오히려 현대 기아가 우리를 보고 배운 점이 많아요

Q: 많은 사람들이 대우자판 진행사항을 궁금해할 것 같습니다.

대우자판이라는 회사가 2003년에 워크아웃 이후 법정관리까지 갔는데 사실 연 매출이 1000억원이 넘는 100대 기업에 들어가는 건실한 회사였습니다. 쉽게 말해 영업소만 있으면 차는 GM대우에서 자동차 가지고 와서 판매만 하면 되기 때문에 IMF때도 굉장히 재무상태가 양호했고 부채비율이 낮은 건실한 기업이었죠. 그런데 현재 구속된 경영진이 취임하자마자 아파트 건설에 눈을 돌렸어요 자동차 팔아서 번 돈을 건설 쪽으로 밀어 넣었죠

Q: 소위 문어발식 경영을 한 거군요.

예를 들어 송도에 회사 땅이 어마어마하게 있어요. 파라마운트사하고 102층짜리 건물을 지어가지고 복합 빌딩을 막 추진하던 과정이었거든. 근데 당시 경영진이 비자금 축적하려고 건설부분에 손댔다가 금융위기 겪으면서 아파트 가격폭락하고 덩달아 GM대우에서 독점판매권을 끊어버리면서 현금유동성이 끊겨서 회사가 부도가 났죠. 이후 법정 관리 들어가면서 하나는 송도개발 하나는 대우자동차 판매 하나는 자동차 빛만 따는 회사. 즉 채무만 갖고 고 채무가 해결이 되면 소멸이 되는 회사. 이렇게 세가지로 나눴죠.

Q: 구조조정을 통해 회사를 나눠줬으면 인수하는 쪽에서 고용승계라던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데 정리해고자는 빼고 알짜배기만 가져간 거네요.

뭐 인수한 쪽에서는 아쉬울 게 전혀 없는거죠. 싼값에 회사건물이나 부동산만 인수해서 용도 변경을 통해 아파트형 공장을 지어도 되고. 면적이 어마어마하거든.

Q: 소위 대기업들이 지방대사학 인수하는 방식과 똑같습니다. 학생들 등록금 빼먹고 부도 낸 다음 건물 용도 변경하는 것과 다를 게 없네요.

이건 전형적인 자본가들이 하는 그런 수법이죠. 대우자판이라는 회사도 한독시계 만드는 공장을 거저 먹은 겁니다. 당시 한독시계가 송도에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2000년대 송도개발 붐을 타면서 수십 만평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뛴 거죠. 자산가치가 3조원까지 올랐으니까 엄청났지

Q: 이렇게까지 노사양측이 극단적으로 대립하게 된 계기가 뭔가요

우리가 2001년 12월 달부터 극한적인 싸움이 시작되거든요. 사측에서 임금체계를 바꾸려고 했어요 즉 비정규직으로 전환하기 위한 작업이었는데, 당시 우리는 임금체계가 기본금이 70% 성과급이 30% 이런 식으로.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싸워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런데 새로운 경영진들이 전국을 돌면서 판매 직원들을 대상으로 회유를 하기 시작했어요

사실 우리는 기본급이 100만원 정도에서 플러스 되는 게 좋죠. 한대도 못 팔아서 집에 1~20만원도 못 갖다주면 안되니까. 이걸 한꺼번에 다 바꿀려고 하니까 그때부터 싸움이 시작된거죠. 2001년 12월에 전국에 있는 조합원들이 다 상경을 해서 6개월을 서울에 있는 모든 대학교를 전전긍긍하면서 싸웠죠. 그 결과 임금체계가 두 개로 나눠졌어요. 회사의 회유에 자기가 동의서를 쓴 사람들은 회사가 요구하는 20:80으로 가버렸고 끝까지 버텼던 우리는 이전 임금체계를 그대로 유지했어요. 그러니 사장 눈에는 계속 남아있는 200여명의 조합원들이 얼마나 눈엣가시였겠어요

Q: 이런 것이 자연스럽게 2011년 노조원 전원 정리해고와 연결되었네요

그게 2008년도인가 임금 스트레스 때문에 조합원 한 명이 사망을 했어요. 조합원 한 사람이 출근하다가 스트레스로 죽었는데 회사입장은 당연히 산재도 아니고 책임을 안 지겠다. 그래서 유족들 동의 아래 시신을 냉동트럭에다 보관해서 몇 개월을 본사 앞에다 두고 회사랑 싸웠어요.

그 때 왠만한 싸움은 다 해봤어요. 공장사람들도 그렇게 싸움하지 못하는 걸 우리도 다 해봤거든요. 대우 빌딩을 완전히 점거해서도 싸워봤고. 힐튼 호텔에서 GM하고 대우하고 인수조인식 할 때 기자회견장을 점거도 해보고 다해봤죠. 그래도 우리 조합원끼리 그런 얘기는 해요. 쌍용이라던가 한진중공업처럼 크레인에 올라가가지고 그런 거는 절대 하지 말자. 같이하면 같이하지 혼자 올라가 죽는 거는 하지 말자.

Q: 현재 대우자판의 가장 큰 문제는 여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안 보인다는 겁니다. 같은 판매직이라도 홈플러스 비정규직 투쟁처럼 생산라인을 중지시킬만한 힘이 없는 상태에서 이슈메이킹에 대한 유혹을 받지 않으셨나요

“절대로 하지 말자” 이런 건 아니고 “같이하자” “한 두 사람의 희생으로 하지는 말자” 는겁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한진중공업에 김주익 지회장이라고 작년까지 김진숙 지도의원이 있었던 그 크레인에서 목 매달아 죽었거든요. 그때 여러 번 갔었는데 내가 조합원들하고 우리끼리 소주 한잔하면서 “저 사람 저렇게 놔두면 안 된다.” 간부 하나가 더 올라가서 같이 있던지. 한 사람을 외롭게 저렇게 놔두면 절대 안 된다고. 아니나다를까 어느 날 아침에 목 메달아 죽었다고. 너무 마음도 아프고 개인적으로 너무 충격이었어요

Q: 장단점이 있겠지만 이런 식의 강성 노동자 투쟁을 하다 보면 계속 희생자를 요구하는, 소위 ‘열사’화 정치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침마다 김주익을 보면서 사람을 저렇게 놔 둬서는 안 된다고 봤거든. 그래서 “이 공돌이들 의리도 없다.” 어떻게 사람 하나를 저렇게 얹혀놔 놓고..., 그 외로운 공간에다가 사람을 몇 달씩 놔 둔다는 거는 비인간적이죠. 결과적으로 노동조합이 죽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목숨이라도 걸어서 이슈메이킹을 한다는 극단적인 책임감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방법은 개인적으로 원치 않아요. 왜냐면 우리가 싸울 때 회사하고 너무 그렇게 갔었거든요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한편으론 서로 조금씩 양보를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이제와 듭니다. 결국 회사도 망해버렸고 우리도 이렇게 돼 버렸고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라서 그렇게 따랐는데 돌이켜보면 여러모로 아쉽죠

Q: 한편으론 노동자를 보호하고 기업들을 견제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너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이 좀 싫었어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대한민국의 경우는 더.. 특히나 노동 운동하다 해고되면 다른 직장 잡기가 어려워요. 찍히니까. 그래서 한번 해고가 되면 직장생활이 끝나는. 복직투쟁을 해도 기업자체가 법을 안 지키니까. 판결이 나도 그걸 안 지켜주니까 기업이. 96년도 김영삼 시절 새벽에 날치기 통과시킨 노동악법이 그 당시에는 이렇게 피부에 와 닿을지는 몰랐는데. 현재 시스템으로는 정리해고하고 사람 없앤 자리에 비정규직으로 대체하고. 앞으로 젊은 세대는 더 하겠죠. 그래서 애들한테 외국 나가서 살아라 기회가 되면 나가라. 종종 이야기해요

Q: 농성장에서 생활하시면서 꿈 같은 것 꾸세요

악몽을 꾸죠. 여전히 싸우는 꿈 꿉니다.

Q: 사실 전 정리해고 투쟁이 철거투쟁이랑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원칙적으로 철거민이나 해고노동자나 스톱하면 거기서 끝나는 거죠. 이 싸움을 지속하는 자기 이유가 있으세요

이유야 많죠. 워낙에 핍박을 많이 당해서 막판에 정리해고 당할 때는 동요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어요. 근데 싸움이 길어지다 보니까 당장 떠나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 몇 번씩이나 들죠. 그래도 어쨌든 옳은 일을 주장하는 게 맞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힘들게 싸움한 사람들끼리 끝은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은 해요. 만약 복직합의가 된다면 그 순간에 딴 데 가고 싶기도 하고 그래요

Q: 마지막 질문입니다. 만약 제가 선생님한테 1억이라는 현금을 드리고 맘에 드시는 차를 고르시라고 했을 때도 대우차를 사시겠어요?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대우차를 사고 싶어요. 그러니까 여기도 대학 졸업하자마자 첫 직장인 사람이 몇 명 있어요. 난 대학을 못나왔지만 그래도 이 직장에 대한 애정이 아주 컸었어요. 내가 원했고, 내가 선택했고, 사실 르망이 예뻐서 선택한게 크지만(웃음) 나름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고 자부해요. 아직도 이 회사에 대한 애정은 있어요. 지금도 대우차를 타고 있고.

긴 시간 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부디 좋은 결과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사진 정윤석
녹취/ 손광은